김환태는 ‘한국 비평문학의 효시’라 불리는 인물이다. 1934년에서 1940년까지 순수문학 지향의 문학 비평가로 크게 활동했다. “(문예비평가는) 순수히 작품 그것에서 얻은 인상과 감동을 충실히 표출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가 일제 강점기 무주 출신 비평가이기에, 전북 무주군 최북로에 ‘김환태 문학관’이 있다. 그곳에서 김환태 에세이 <내 소년 시절과 소> 내용 일부를 접할 수 있었다.
“시내가 아침에 해도 겨우 기어오르는 병풍 같은 덕유산 준령에서 흘러나와 동리 앞 남산 기슭을 씻고 새벽달이 쉬어 넘는 강선대 밑에 휘돌아 나간다. (…) 어떤 날 나는 처음으로 풀을 뜯기러 소를 몰고 들로 나갔다. 소가 풀을 으득으득 뜯을 때 그 풀향기가 몹시 좋았다. 산그림자 속에 풍경 소리가 맑았다. 나는 해가 지는 줄을 몰랐다.”
김환태는 무주의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자연을 벗 삼아 유년기를 보내며 문학적 감수성을 키웠다. 문학비평가로 알려진 그는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시인 정지용과 만난 김환태
그의 작가론 내용을 잠시 언급하겠다.
김환태는 1928년 교토 도시샤 대학(예과 3년), 후쿠오카 규슈 제국대학(영문학과 3년)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학문이 문학”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대학에서 광범위한 독서를 한 끝에 창작보다는 문학 이론에 관심을 돌렸고 결국 비평가가 되기에 이른다.
김환태에게 큰 영향을 준 영국 평론가 월터 페이터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상대적인 가치밖에 없기 때문에, 예술을 완성하고 향수하기 위해서 예술가와 독자(감상자) 쌍방이 의존해야 할 것은 각자의 주관밖에 없다고 피력했다.
여기서 ‘주관’은 감상, 인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김환태는 비평가(감상자)가 작품을 읽고서 (작가의) ‘체험을 재구성’한 다음 자신의 인상을 중요하게 기록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인상주의 비평가로서 자리를 잡는다.
일본 도시샤 대학 유학 시절, 그가 시인 정지용과 만난 일화는 유명하다. 정지용의 시 ‘향수’가 여기에서 처음 등장한다.
‘어떤 칠흙과 같이 깜깜한 그믐날 그(정지용)는 나를 상국사 뒤 끝 묘지로 데리고 가서 <향수>를 읊어주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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